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대충 돌아간다
신계(神界)를 꿈꾸던 시절의 환상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이 바닥 어딘가에 ‘신의 단계’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연차가 쌓이고 내공이 깊어지면, 마치 무협지의 고수처럼 일의 이치를 통달하고 모든 문제를 단칼에 해결하는 경지에 오를 것이라 생각했다.
업계 선배들이나 유명 인사들이 현란한 마케팅 이론이나 디자인 철학을 인용하며 프로젝트를 리딩하는 모습을 볼 때면, 그들은 내가 모르는 ‘비책(祕策)’을 가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완벽하고 체계적인 세계에 대한 동경, 그것이 나의 젊은 시절을 지배했다.

환상의 깨짐 : 인생 별게 없네
하지만 정년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고, 직접 회사를 운영하며 깨달은 사실은 단 하나다. “그런 건 없다.”
우리가 하는 일은 고차원적인 ‘과학’이나 ‘철학’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저 그때그때의 경험과 감각에 의존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기술(Technology)’의 영역이었다.
선배들이 읊던 그 멋진 이론들은 사실, 그들의 ‘체계적이지 않은 직관’을 설명하기 위한 사후 포장지였을지도 모른다.
– 이론과 실무의 괴리
처음엔 내 분야(디자인)만의 문제인가 싶었다. 결과물의 퀄리티가 체계적인 시스템보다는 작업자의 컨디션이나 개인기에 따라 좌우되는 ‘뽑기 운’ 같은 현실에 회의감도 들었다. 혹은 내가 부족해서 이론을 실무에 효율적으로 적용하지 못하는 것인가 자책도 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점수 잘 받는 요령과, 답 없는 문제를 파고드는 실무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이건 디자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고 부동산 실무에 뛰어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기본 소양’이라는 이론 과 ‘실무’는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다. 결국은 맨땅에 헤딩하며 몸으로 체득한 ‘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해봤어?’의 역설
도전 정신의 상징인 “해봤어?”라는 말을 곱씹어 본다. 막상 맨땅에 헤딩하며 해보니, 대단한 신대륙은 없었다. 내가 고생 끝에 외친 “유레카!”는 사실 선각자들이 이미 밟고 지나간 길, 즉 상식에 불과했다.
나는 그저 우물 안에서 내가 찾은 것이 세상의 전부인 양 착각했던 것은 아닐까? 새로운 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그저 선각자들이 간 길을 몸으로 확인하는 과정일 뿐이다.
시스템으로 포장된 현실의 민낯
친구들과 소주 한 잔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눠보면, 이 ‘주먹구구의 법칙’은 비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된다. 겉보기엔 완벽한 시스템으로 돌아갈 것 같은 세상도 속을 들여다보면 사람 냄새 나는 임시방편으로 돌아간다. (오해 말자 전부다 그런 것은 아니다).
– 땜질 처방
첨단 제품을 만드는 기업조차 고질적인 불량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다, 일부 해결되지 않는 한계 속에서 당장의 불만 끄는 ‘임시 땜빵’을 하기도 한다. 전문가 회의는 해결책이 아닌 책임 회피의 장이 되기도 한다.
– 현장의 비효율
단 몇 시간의 행사를 위해 과도한 자원을 들이붓고 허물어버리는 일부 현장을 보며, 정교한 계산보다는 “일단 되게 하라”는 무식한 실행력이 여전히 세상을 움직임을 느낀다.
– 사후약방문
금융 시장도 다를 게 없다. 자칭 ‘신’이라 불리는 전문가들은 이미 지나간 차트를 보며 그럴싸한 이론을 갖다 붙인다. 하지만 그들의 이론은 실전의 수만 가지 변수 앞에서 무력하다. 결국 시장을 꿰뚫는 절대 비책은 없다.

그래, 다들 이렇게 산다
한때는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아 불안했다. 남들은 다 앞서가는데 나만 제자리인 것 같은 그 조급함.
하지만 이제는 안다. 다들 그렇게 산다는 것을.
공자의 말이 틀린 게 하나 없다.
불혹(不惑)이라 했지만, 40대의 나는 여전히 흔들렸고, 그 흔들림 속에서 중심을 잡아가며 버텼다.
50대(지천명)가 되니 “세상은 원래 불완전하고 주먹구구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하늘의 뜻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그리고 언젠가 60대(이순)가 되면, 그 불완전한 이치마저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순응하게 되지 않을까.
에필로그: 신계는 없지만, ‘지혜’는 남는다
우리가 꿈꾸던 ‘신계는 없다’, ‘완벽한 체계도 없다’고 해서 너무 막막해하거나 비관할 필요는 없다.
맨땅에 헤딩하며 보낸 지난 세월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니까.
이론서에는 없는 수만 가지 변수가 닥쳐왔을 때 당황하지 않고 즉시 대처하는 ‘순발력과 지혜’, 웬만한 풍파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단단한 멘탈’, 그리고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위험을 분산시키는 ‘리스크 관리 노하우’. 이것들은 책상 앞에서 배운 이론이 아니라, 거친 실무현장에서 살아남은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훈장 같은 것이다.
우리는 종종 착각한다. 나도 노력하면 세상을 뒤집는 리더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냉정하게 보자. 콜럼버스나 에디슨, 혹은 스티브 잡스나 일론 머스크 같은 혁신가는 인류의 0.1%도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처럼 되지 못했다고 실망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위안을 얻는다. 그들은 세상을 이끈 자신의 분야에서는 ‘슈퍼맨’이었을지 몰라도, 인간관계나 가정, 혹은 다른 분야에서는 ‘머저리’ 소리를 들을 만큼 결핍 투성이인 사람들이 많았다. 공평하게도 모든 능력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나만의 방식을 긍정하려 한다. 비록 세상이 기억할 위인은 아닐지라도, 내 앞에 놓인 문제들을 해결하고, 내 사람들을 지키며, 오늘 하루를 무사히 버텨낸 우리야말로 ‘삶’이라는 분야의 진정한 마스터가 아닐까.
주먹구구면 어떠한가. 결국 우리는 해내고 있는데.

